[기고] 6.25와 6.10의 6월

↑ 6월에 활짝핀 장미

 

양기가 충천한 6월은 음력으로 5월에 해당한다. 농부에겐 한 참 바쁜 시기이다. 5월 농부, 6월 신선이라 했던가! 지금은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지만 사 오십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가장 많았던 농업 국가였다.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라 해도 당시 농촌에서는 ‘보리 고개’라는 말이 흔하던 시기였다.

 

그런 6월에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6.25를 겪는다. 민간인 사망자가 수백만 군인 전사자는 수십만에 이르는 ‘2차 대전’ 이후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같은 민족끼리 싸운 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서로 질시와 반목을 거듭했지만, 자식세대에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5.16을 지켜보고 유신독재를 견뎌냈다. 개중에는 월남에 파병되어 전사한 분도 있고 열사의 나라 중동에 파견되어 외화를 벌어들이고 가계를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한 분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돈 벌러 들어오는 외국인 근로자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6월을 6.25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산업화 세대’라는 데서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민주화 비용이라는 게 있다. 80년대 기준으로 일인당 GDP가 3,000 달러를 넘지 못한 나라는 민주화에 성공한 예가 없다는 이론이다. 80년도에 우리나라는 북한보다 일인당 GDP가 낮았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선전했던 서울 지하철도 북한보다 늦었고 TV 칼라 방송도 북한이 우리보다 빨랐다. 80년대 당시에는 이런 이야기를 공개석상에서 했다가는 경찰에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유신의 뒤를 이어 다시 군사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적군을 향해야 할 총구를 민주화 요구하는 국민에게 겨누면서. 그래도 다행히 88올림픽을 성공리에 마치고 유가, 원자재 가격, 국제 금리 하락이라는 삼 저 현상에 힘입어 국민 일인당 GDP 3,000달러를 달성했다.

 

독재를 연장하려는 군사정권은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친다. 이른바 6.10 항쟁이다. 산업화 다음의 가치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였다. 정통성 없는 정부에 복종할 아무런 이유를 느끼지 못 했던 당시의 대학생들과 젊은 직장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빵만으로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온 국민의 호응을 얻었던 6.10 항쟁은 군부독재의 항복을 받아내고 5년 후에는 문민정부가 들어선다. 민주화는 이렇게 이루어 졌다. 목숨 바치고 피 흘린 ‘민주화 세력’의 희생으로.

 

흔히 우리를 보고 경제와 민주화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2차 대전’ 이후에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를 보고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없다. 경제적인 부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완성만으로는 부족한 무엇이 있다. 국민이 행복해야 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문화적인 면에서, 개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통한 만족에서, 남을 위한 배려나 봉사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선진국이라고 자부하기에 뭔가 부족한 면이 있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는 서로 반목한다. 좌우로 동서로 이제는 세대별로 나뉘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틀렸다는 독설을 퍼붓는다. 누구를 위한 갈등이고 반목인지 모르겠다. 산업화의 가치가 그렇게 하찮은가? 민주화는 거저 주어진 것인가?

 

멋진 2층 집을 지어놓았다. 그 자체로 보기 좋은 동네에서 가장 멋진 2층집! 그 2층집이 1층 없이 가능한가? 1층이 아무리 견고하고 2층의 기초가 된다하더라도 2층이 없으면 그냥 단층집이다. 집 주인이 만족하고 집에서 사는 가족이 화목해야 보는 사람들도 부러워 할 것이다

 

[ 무애건축 대표 민만기 ]